
‘사마리아’로 2004년 세계 3대 영화제 가운데 하나인 베를린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김기덕 감독은 ‘위안부 누드’ 파문을 일으켰던 이승연을 주연으로 내세운 ‘빈집’으로 같은 해 또 하나의 영화제인 베니스 영화제에서도 감독상을 받았다. 영화 ‘빈집’은 빈집에 갇힌 선화(이승연)와 빈집을 여는 남자 태석(재희)의 사랑을 통해 인간의 기다림과 고독을 다룬 작품이다. 여기서 우리 모두 ‘빈집’에 대해 생각해 보자.
세계를 집으로 삼는 나그네 ‘코스모폴리탄(세계주의자)’, ‘코스미안(우주인)’ 입장에서 말이다. 26년 전(2000년) 당시 31세의 미국인 ‘제프리’라는 사람은 직장을 그만두고 재산을 다 처분해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여행을 떠났다. 노스캐롤라이나주 애쉬빌에서부터 그야말로 ‘방랑 김삿갓’ 같이 떠도는 도보 여행길에 오른 것이다. 삶과 사랑과 자유의 의미를 찾아보는 일 외에는 그 어떤 행선지도 다른 목적도 없이 떠난 것이다. 금전만능의 자본주의 물질문명에 환멸을 느낀 그는 무엇을 소유한다는 것이 되레 소유물에 소유 당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유인’으로서 ‘무소유’의 삶을 살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가 가장 포기하기 힘들었던 것은 의료보험이었다. 미국 각 지역과 멕시코, 하와이, 동남아 등지로 ‘무전여행’을 하면서 그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마치 야생의 들짐승이나 날짐승처럼 ‘무엇을 먹고 입을까’ 걱정할 것도 없이, 배고프면 먹을 것이 나타나고, 쉬고 싶을 땐 잠잘 곳이 생기더란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의료보험이 있을 땐 자주 아팠었는데 자구력, 자생력이 생겼는지 약을 먹을 일도, 의사를 찾을 일도 없이, 몸이 건강해졌다고 한다.
이렇게 그 누구에게도 결코 소유될 수 없는 지구라는 행성에 잠시 머물다 가는 인생이라면 이런 빈집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 비록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각종 소유욕과 애착심을 끊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천지간에 한 번 떠올린 생각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게다가 ‘생각이 말이라는 씨’로 공중에 뿌려지면 땅에 심어져 뿌리를 내리고 때가 되면 그 열매를 맺게 되는 자연의 섭리와 이치를 가리켜 우리말에 ‘말이 씨가 된다’고 하는가 보다.
1970년대 내가 영국에 살 때 그 당시 영국 국영방송 BBC 라디오에서 매주 ‘Desert Island(열대지방의 무인고도)’란 음악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한번은 우리나라의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씨가 초대 손님으로 나와 진행자의 물음에 대답한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CD가 등장하기 전이라 단 몇 개의 레코드판만 갖고 갈 수 있는데, 누구의 곡을, 누가 연주한 것을 그 무인고도에 갖고 가겠느냐는 질문과 더불어 그 이외에 단 한 가지 더 갖고 갈 수 있다면 뭘 선택하겠느냐는 또 다른 물음에 정경화 씨의 더할 수 없이 훌륭하고 멋진 답변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무릎을 치면서 감탄의 탄성을 발했었다. 그 대답은 ‘꽃씨 한 주머니’를 갖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시인 게리 스나이더는 ‘자연환경과 인류문명에 관한 에세이집’에 실린 한 편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의 몸은 자연 그대로이다. 누가 갑자기 별안간 소리라도 지르면 저도 모르게 우리는 고개를 돌린다. 높은 절벽에 서서 밑을 내려다보노라면 현기증이 나서 어지럽다. 뒤로 물러서도록. 그리고 위험에라도 부닥치면 간이 콩알만 해진다. 그 이외에도 숨을 죽인다든가 조용히 숨을 쉰다든가 하는 작용은 보편적인 포유동물들의 신체적인 반응이다. 신체는 어떤 의식적인 지성(知性)의 중재와 조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폐장이 호흡을 하기 위해 쉬지 않고 신축하는 숨 쉬는 일이나 심장 뛰는 것이 대체로 자동 조절되는 그 자체의 삶이다. 머릿속으로는 ‘나’라고 하는 ‘네가’ 놓치지 않고 다 셀 수 없는 수많은 생각들, 기억들, 상상들, 환상들, 분노, 기쁨, 슬픔 등 온갖 상념들이 시도 때도 없이 거침없이 떠오른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우리의 ‘회의 사항’을 짜내는 자아는 우리 신체라는 세계의 아주 작은 영역을 차지할 뿐이다. 그 광대무변의 소우주 출입구 문간방 구멍으로 무엇이 들어오고 나가는지 살피면서. 그리고 때로는 음모까지 꾸미면서. 신체, 몸은 말하자면 머리, 정신 아니 마음속에 있다. 자연 그대로 야생적이다.”
아, 그래서 절체절명의 위급상황을 위한 비장의 무기를 뜻하는 ‘만능패’를 영어로 ‘와일드카드(will card)’라 하는 것이리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