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서부의 쓰촨성(泗川省)에는 티베트족들의 신산이라 불리는 야라설산(5,280m)과 당링설산(5,476m), 그리고 동양의 알프스라 불리는 쓰구냥산(6,250m)이 있다. 티베트고원에 있는 이 산들 속으로 들어가 평균 해발고도 3,200~4,200m의 초원길을 걷다 보면 만년 설산 아래 신비로운 색감의 빙하 호수와 침엽수가 울창한 원시 산림과 대초원, 그리고 험준한 자연에서 신앙의 힘으로 굳건하게 살아가는 티베트인들을 만날 수 있다.

우리는 단바를 기점으로 하여 쓰촨성의 3대 명산을 트레킹 하는데, 처음 만나는 산이 바로 야라설산(亚拉雪山)이다. 이 산은 티베트어로 '동방의 흰 야크산'으로 불리며 티베트인들의 신산(神山)으로 숭상받는 산이다. 비취색의 아름다운 빙하 호수와 푸르른 초원, 그리고 주변의 원시림과 함께 일 년 내내 눈이 쌓인 성스러운 새하얀 만년 설산이 어우러지는 비경은 성스럽기만 하다.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아침 일찍 단바 시내의 호텔을 출발하여 단바의 젖줄 대도하를 가로지르는 자룽대교를 건너 갑거장채 방향으로 달리다가 좌회전하니 심연의 협곡이 나타난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가 미인곡(美人谷)으로 들어서니 가파른 산자락을 따라 이어진 미인곡의 민가들이 보인다. 단바(丹巴)의 미인곡에는 사연이 많다. 중국 북서부의 간쑤성(甘肅省), 산시성(陝西省)에 있었던 티베트인의 분파인 탕구트족의 왕조 서하(西夏)는 몽골의 칭기즈칸에 의해 멸망했는데, 후손 중에서 남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왕가의 여인들만 포로가 돼서 몽고로 끌려갔는데 도중에 도망치며 숨어든 곳이 바로 이곳, 험난하기 짝이 없는 단바 협곡이었다고 한다.
이들이 세운 동녀국(東女國)에는 서하왕조의 피를 이어받아 전통적으로 미인들이 많았다. 대대로 이어온 동여국의 '상청(尙靑)' 풍을 전승한 이곳 여인들은 아름다운 산의 정기까지 이어받아 조상들이 그랬듯이 위엄 있고 반듯한 명문가의 규수다운 풍치를 물씬 풍긴다고 한다. 해마다 5월에 펑칭제(風情節) 행사가 열리면 검은색의 중후하고 아름다운 전통 의상에 화려한 소품으로 단장한 매력 넘치는 미인곡 미녀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미인곡을 지나 험준한 산악 지형의 좁디좁은 협곡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바람에 긴장을 놓지 않으려고 버티다 보니 잠은 어느새 달아나 버렸다.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우뚝 솟은 절벽아래로 설산의 기운을 받은 차디찬 물이 흐르고, 계곡을 잇는 흔들다리 난간에 매달려있는 타르초는 바람에 온몸을 떨면서 심하게 흔들린다. 바람은 타르초의 불경을 읽고 물소리보다 더 빠르게 멀리 퍼져간다.

단바에서 1시간 30분 걸려서 마침내 타이짠거우(台站沟)의 야라설산 전망대에 도착한다. 티베트어로 '흰 야크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라서 과연 전망대 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흰 야크 같은 모양인지 야라설산을 바라보니 실제로 야크의 몸통이나 머리를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보인다. 가이드에 따르면 보는 방향에 따라 산의 모습이 크게 달라지는데, 타공초원에서는 연꽃, 바메이 쪽에서는 왕관, 다른 방향에서는 앉아 있는 부처처럼 보인다고도 한다. 불교에서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는 말이 있는데, 모든 사물과 상황은 보는 이의 시각과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지므로 야라설산이 어떻게 보이던 무엇이 중요하랴.
전망대에서 기념 촬영을 마친 후 자연보호구 매표소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산행 출발 장소로 이동한다. 새하얀 설산 아래 푸른 초원 사이로 빙하수가 흐르는 선경이 계속 펼쳐 지는데 군데군데에서 화려하게 예복을 차려입고 웨딩 사진을 촬영하는 선남선녀들 모습이 보인다. 복숭아밭만 있으면 여기가 바로 도원경(桃源境)이고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는 생각이 들어 셔틀버스를 타고 가면서 복숭아밭을 열심히 찾아본다.

입구에서 30분 정도 이동해서 셔틀버스 주차장에서 내리면 바로 옆에 천막이 여러 동 있고 그 옆으로 말들이 메여 있다. 이곳을 찾는 중국 관광객들은 여기서 거의 말을 타고 야라설산을 올라가지만 우리는 걸어서 올라간다. 이곳에서 갈림길이 있는 우조습지까지 산길은 삼나무숲 옆으로 난 꾸준한 오르막길이다. 해발고도가 3,750m인 데다 초입부터 오르막이라 모두 힘들어하지만 산길 오른쪽으로 설산의 조망이 수시로 터지면서 힘든 생각을 잠시 잊게 해준다. 그래도 힘들면 뒤따라오는 설산들과 자주 눈을 맞추면서 호흡을 가다듬는다. 이렇게 1시간여 꾸준히 산오름을 해서 야라패스의 자매호수와 야라우조(옥석해)의 갈림길인 우조습지(友措濕地)에 도착한다.

파란 하늘 아래 자리한 푸르른 습지 초원에는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고, 언덕에는 수십 마리의 야크들이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며 풀을 뜯고 있는 그야말로 평화롭고 여유로운 풍경이다. 야라패스 언덕으로 오르는 산길에 서 있는 설산들은 하늘과 맞닿아 있고 주위는 그림 같은 야생화 들판이 펼쳐져 있다. 목가(牧歌)가 울려 퍼지는 광활한 천상화원인 우조습지를 뒤고 하고 오른쪽에 있는 아라우조 호수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우조습지에서 삼나무숲으로 들어가서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티베트인들이 신령스럽게 여기는 만년설로 덮인 '샤쉐야라가보(夏学雅拉嘎波, 5,820m)'가 바로 눈앞에서 빛나고 있다. 티베트어로 '동방의 하얀 야크 산'이란 뜻인데, 티베트의 중심인 라싸를 기준으로 동쪽에 있는 산이라 붙여진 이름이며 그냥 간단하게 '야라설산'이라고도 부른다.

구름을 머리에 인 설산 아래에 푸른 우조호수(友措湖)가 펼쳐지고 주변의 원시림과 함께 그 끝자락에 드넓은 초원이 자리하고 있어 성스러운 풍경을 자아낸다. 웅장하고 신성한 분위기로 가득한 호수 위로 거대한 봉우리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고, 그 아래에 고요한 호수가 자리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일순 멈춘 듯한 느낌을 받는다. 타르초가 펄럭이는 호숫가에 서서 해발 4,100m의 산상 호수가 옥빛으로 빛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거대한 자연 앞에 인간의 존재가 한없이 작다는 것을 느낀다.

호수를 거의 한 바퀴 감고 있는 타르초가 오늘따라 더 경건하게 느껴진다. 오색의 사각 천에 새긴 부처의 가르침, 경전의 지혜가 바람과 함께 온 세상에 널리 퍼지라는 염원이 아니던가.
서슬 푸르게 시린 하늘과 꼿꼿이 볏을 세운 불모의 산들, 황량한 대지 군데군데 보석처럼 박힌 만년설과 비취색 호수. 한편의 아이맥스 영화처럼 펼쳐지는 대자연의 파노라마는 '순결하고 아름답다'라는 '캄(Kham, 康)'의 의미를 토씨 그대로 전달한다.
'캄'은 전통적으로 티베트를 구성하는 3개 지역 중 하나로, 동티베트를 지칭한다. 캄파라 불리는 캄의 원주민들은 고대부터 독립 의지가 강한 민족으로 알려져 있는데, 티베트 중앙 정부와 중국 왕조들의 간섭에 대항하여 자주 봉기를 일으켰다. 중화민국 정부는 캄 지역을 한족화시키기 위해 티베트에서 분리시켜고자 시캉성을 설치했으나, 중국은 시캉성을 폐지하고 서부는 티베트 자치구, 동부는 쓰촨성에 귀속시켰다. 지금 우리가 여행하고 있는 캄 지방은 아직도 티베트 전통문화가 잘 남아있는 곳이다.

호숫가에서 과일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야라패스로 가는 갈림길이 있는 우조습지를 향해 출발한다. 우조습지를 지나 야라패스로 가는 길은 꾸준한 오르막이다. 한 프레임에서 사계절을 만날 수 있는 동티베트의 신비로움은 상상 이상이다. 정상은 만년설이 쌓인 겨울이고 우리가 걷는 7부 능선은 녹음이 짙고 야생화가 만발한 여름의 초원이다. 중국의 옛시인들이 "산 하나에 사계절이 있고, 10리마다 날씨가 달라진다."라고 읊었던 것이 바로 동티베트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가이드가 이곳 산들은 기상 상황이 시시각각 변화가 무상하여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인데 오늘은 하루 종일 맑은 날씨라 모두 표정이 밝다.

설산 아래 넓은 평원 사이로 휘어지며 흐르는 물길을 따라 걷는다. 뒤돌아보면 걸어온 길의 풍경이 힘을 보태지만 여전히 숨은 가쁘기만 하다. 고통이 없으면 결실도 없다. 절로 얻는 절경이 어디 있으랴.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니 늘어선 설산 봉우리들이 가깝게 다가온다. 황량하지만 장엄한 풍경이 이어진다.

휘어진 길이 설산 앞에서 뚝 끊어지는 것을 보니 이제 자매 호수에 가까이 온 모양이다. 드디어 해발 4,200m 야라패스 고갯마루에 올라선다. 설산 아래에는 푸른 하늘에서 초승달 한 조각이 떨어져 나온 것 같은 푸른 호수 2개가 보이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뚝 건들이면 금방이라도 쨍하고 금이 갈 것 같다. 시야가 뻥 뚫리니 마음마저 날아갈 듯이 가벼워지고 가쁘기만 했던 거친 호흡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호수를 향해 내려가는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드디어 오늘 트레킹의 목적지 해발 4,160m의 자매 호수 앞에 내려선다. 호수 뒤로 이보다 작은 호수 하나가 부끄러운 듯 숨어있다. 호수가 두 개라 자매 호수라고 이름 지었을 것이다. 언니보다 약간 작은 동생 호수마저 제대로 눈에 담기 위해 호수에서 산 위로 올라간다. 높이 올라가니 더 많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 끝으로 조금 전에 다녀온 야라설산이 우뚝 하고, 왼쪽으로는 뾰쪽한 설산의 연봉들이 병풍을 두른 듯 도열해 있다. 그 사이에 하늘색을 닮은 호수는 좌우 산들의 반영을 품 안에 담고 있고 호숫가 야크 떼들이 풀을 먹으며 유유자적 노닐고 있는 모습까지 더해지니 여기가 바로 선경이 아니던가.

호수를 잘 내려다보려고 바위가 섞인 초원 지대로 올라왔는데 동행한 친구가 뜻밖에 귀한 동물을 만나는 행운을 누린다. 바로 히말라야 마모트다. 히말라야 마모트(학명: Marmota himalayana)는 설치류의 다람쥐과에 해당하는데 주로 티베트고원과 쓰촨·칭하이·티베트 등의 고산지대에 서식한다. 초식동물로 굵고 통통한 몸, 짧은 꼬리, 굴을 파서 생활하며 겨울에는 동면하는 생태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야라설산의 마모트는 다른 지역의 마모트에 비해 상당히 큰 편이라고 한다. 토끼보다 훨씬 큰 몸집으로 사람을 보면 큰 소리로 울기도 한다는데 오늘 만난 마모트는 사람을 피하는 기색이 별로 없어 보인다.

야라패스를 넘어 돌아가는 길 오른쪽에 있는 거대한 바위산이 쓸쓸한 색조로 띠며 다가온다. 설산 아래 드넓은 평원에서 룽따와 타르초가 서 있고 주위의 설봉들이 정좌하여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룽따와 타르초는 거센 바람에 휘날리며 소리 내어 울고 있다. 우리만 있는 이 공간에서 우리와 작별하는 것이 아쉬운 모양이다. 야라패스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우조습지를 내려다보며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천천히 감상하면서 걷는다. 우조습지에 도착해서 등산화 끈을 풀고 차디찬 빙하수에 손과 발을 담그니 정신이 번쩍 들면서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호접지몽(胡蝶之夢)에서 비로소 깨어난 듯하다.
우조습지 들판에 핀 야생화들에게 "따시델렉" 하며 작별 인사를 건네니 꽃들이 몸을 흔들며 화답한다. 오늘은 고소증까지 경험하며 7시간 이상 힘든 산행을 했지만 숭고한 대자연 앞에서 평화로운 마음과 맑아진 영혼을 얻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을 내려온다.

[여계봉 대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이메일 : yeogb@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