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은 참 이상한 동물이다. 배가 부른데도 더 맛있는 것을 찾고, 집이 있는데도 더 큰 집을 원하고, 차가 있는데도 더 좋은 차를 꿈꾼다. 하나를 가지면 둘을 원하고, 둘을 가지면 열을 갖고 싶어 한다. 어제 그렇게 갖고 싶었던 것이 오늘은 당연한 것이 되고, 오늘의 만족은 내일의 더 큰 만족을 원한다. 인간은 부족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만족할 줄 몰라서 불행한 것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싫어해도 배부른 돼지는 모두가 원한다.
만족은 가난한 사람의 체념이 아니다. 오히려 만족은 가장 얻기 어려운 사치다. 돈으로 살 수도 없고, 명품으로 꾸밀 수도 없으며, 남에게 빌릴 수도 없다. 수백억을 가진 사람도 만족하지 못하면 가난한 사람이고,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오늘의 삶을 고맙게 여길 줄 안다면 부자다. 결국 부의 크기는 통장에 적힌 숫자가 아니라 욕망과 현실 사이의 거리가 결정한다. 오죽하면 모든 종교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죄악시하고 있지 않은가.
문명은 인간의 불만에서 시작되었다. 더 편한 집을 원했기에 건축이 발전했고, 더 빨리 이동하고 싶었기에 자동차와 비행기가 생겼으며,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기에 과학이 발전했다. "이 정도면 됐다"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은 달까지 갔다. 그런 의미에서 불만은 인류 발전의 엔진이었다. 문제는 엔진을 멈출 줄 모른다는 데 있다. 자동차에 브레이크가 필요하듯 인간의 욕망에도 브레이크가 필요하다. 그 브레이크를 멈출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밖에 없다.
현대사회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속삭인다. 부족함 채우라고 홈쇼핑에서, 쿠팡에서, 각종 사이트에서, 백화점에서, 여행사에서 끊임없이 유혹한다. 광고는 우리의 결핍을 찾아내고 그것을 상품으로 만들어 판다. 만족하는 사람은 소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낸다. 어제의 행복을 낡은 것으로 만들고 내일의 행복을 구매하도록 유혹한다.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은 욕망이라는 상품의 가장 훌륭한 소비자다.
SNS는 이 경쟁을 더욱 잔인하게 만든다. 우리는 남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만 골라 본다. 누군가는 해외여행을 가고, 누군가는 멋진 집에서 살고, 누군가는 성공한 사업가가 되고, 누군가는 아름다운 몸을 자랑한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평범한 하루가 초라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가 비교하는 것은 남의 인생 전체가 아니라 남의 인생에서 편집된 몇 초다. 타인의 하이라이트와 나의 일상을 비교하는 순간, 만족은 사라진다.
만족은 포기가 아니다. 만족은 더 이상 욕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욕망에 끌려다니지 않는 것이다. 더 좋은 것을 원하면서도 지금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 성공을 꿈꾸면서도 현재의 자신을 실패자로 취급하지 않는 것, 내일을 준비하면서도 오늘의 햇빛을 놓치지 않는 것. 이것이 진짜 만족이다. 정상에 올라가야만 행복하겠다고 생각하면 산을 오르는 모든 순간이 고통이 된다. 하지만 걸어가는 길 자체를 사랑한다면 정상에 오르지 못해도 인생은 실패가 아니다. 우리는 부족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충분한 줄 몰라서 불행하다. 만족은 욕망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정신의 사치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다.”
[전명희]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그만두고
‘밖철학연구소’를 설립해 연구에 몰두했지만
철학 없는 철학이 진정한 철학임을 깨달아
자유로운 떠돌이 여행자가 된 무소유이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