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인가. 지겹도록 더운 서울을 떠나 인천공항에서 쓰촨성(泗川省)의 청두(成都)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작년 6월에 고등학교 동기들과 티베트 쪽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EBC) 여행을 마치고 시짱(西藏)의 라싸에서 쓰촨성의 청두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었다. 긴 여정 끝의 여독을 풀고자 잠을 청했으나 비행기 창문을 통해 보이는 티베트고원(칭짱고원)은 가히 감동이었다. 창밖으로 티베트고원의 동부와 쓰촨 고원의 서부를 지나 청두 분지에 이르는 약 1,100km의 고원 지대가 연출하는 장엄한 파노라마가 2시간 30분 동안 펼쳐지는데, 이들 고원은 평균 고도가 약 4,900m에 달해 우리가 타고 있는 비행기 고도와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구름을 머리에 인 설산이 용틀임하며 뻗어 있는 모습과 고원 주변의 드넓은 초원, 그 끝자락에 펼쳐진 푸른 호수들이 어우러지는 장관은 비행기가 청두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이 장면에 감동한 우리 일행은 즉석에서 내년에 이 고원 지대에 있는 쓰촨성의 3대 명산을 트레킹 하기로 약속하고 1년 이상을 기다렸다가 드디어 출국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8월 말 네팔과 티베트 국경 지대인 랑탕과 지룽에서 빙하에 의한 대홍수로 네팔과 중국 지역에서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하는 대형 참사가 발생하는 바람에 여행이 망설여지기도 하고 주변에서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우리가 여행가는 지역은 사고 지역과 1,600km 이상 떨어져 있고, 여행에 큰 문제가 없다는 현지의 확인을 받고서 계획대로 여행을 진행하기로 하지만 한편으로 마음과 발걸음이 무겁다.
청두 천부(天府)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잘생긴 꽃미남 가이드가 우리 일행을 반겨준다. 부모님이 연변 출신이지만 자신은 어릴 때부터 청두에서 자라고 대학까지 졸업한 청두 토박이라고 소개하는데, 중국에서는 듣기 힘든 표준 서울 말씨를 자연스럽게 구사한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2011년 MBC '위대한 탄생' 중국 글로벌 오디션에서 수천 명의 지원자 중에서 4명 중의 한 명으로 선발되어 한국행 티켓을 손에 쥐었으나 한국의 본선 무대에서 스타가 된 주인공은 연변 출신 백청강이었다. 대학 졸업 후 진로를 바꾸어 지금껏 한국 여행객을 대상으로 쓰촨성 관광 가이드로 활동 중이라고 한다.
우리가 트레킹을 하게 될 중국 서부의 쓰촨성(泗川省)에는 티베트족들의 신산이라 불리는 야라설산(5,280m)과 당링설산(5,476m), 그리고 동양의 알프스라 불리는 쓰구냥산(6,250m)이 있다. 이 일대는 외부의 손길이 많이 닿지 않아 자연 그대로의 풍광을 깨끗이 보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아주 높지 않은 평균 해발고도 3,200~4,200m 사이를 만년설이 어우러진 설산을 보면서 트레킹을 즐길 수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
쓰촨성 3대 명산 트레킹의 출발지는 쓰촨성의 성도(省都), 청두(成都)다. 청두라고 하면 중국 삼국지의 위(魏)·촉(蜀)·오(吳) 3국 중 촉나라의 수도로 유명하다. 촉을 건국한 유비와 제갈공명으로 이곳의 명성은 더욱 높다. 특히 촉의 쓰촨성은 3국 시대부터 험준한 지형을 가진 대표적인 지역으로 꼽힌다. 쓰촨성의 북부와 서부는 티베트 문화가 깊이 뿌리내린 지역이므로 서티베트인 시짱(西藏)의 주도(州都)인 라싸에 가지 않고도 티베트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청두에서 설산 트레킹의 전초기지, 즉 단바(丹巴) 까지는 버스로 9시간이 걸린다. 단바로 가는 길은 너무 험하다. 3,000m 고산의 험준한 협곡 사이로 난 아찔한 구절양장의 길을 구비구비 돌아간다. '중국은 역시 ′거대한 대륙'이라는 느낌을 실감 나게 하는 엄청난 거리다. 청두를 출발한 지 1시간 정도를 지나니 가이드가 차창 밖으로 도강언과 청성산을 가리킨다. 수리 시설로 유명한 도강언(都江堰)은 기원전 250년경에 건설된 세계 최초의 수리 시설이다. 구채구에서 흘러온 민강(岷江) 강물을 내강과 외강으로 나누어 보내도록 하여 수량을 조절하여 홍수를 대비하도록 만든 시설이라고 한다. 도강언 남쪽에 있는 청성산(靑城山)은 중국 도교의 발상지로 가장 급수가 높은 관광지(5급)인데, 정상에 도교 사원이 있어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 명소인데 케이블카를 타고도 약간은 등산을 해야 오를 수 있다고 한다. 청성산을 지나니 길이 거칠어지기 시작하고 터널 서너 개를 통과하니 저 멀리 산허리로 아슬아슬한 옛길도 보인다. 산 아래로 푸른 민강이 여유롭게 흐르고 높은 산자락에 걸린 구름이 파란 하늘과 어울려 예쁜 그림을 그려낸다.

영수(汶川)에 가까워지니 풍경이 새롭게 바뀐다. 산을 예리한 손톱으로 할퀸 듯 훝고 지나간 자국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영수는 2008년 5월 12일 발생한 윈난성과 쓰촨성 대지진 때 진앙지로 많은 피해를 입은 곳이다. 당시 지진 규모는 중국 기준 8.0, 미국 기준 7.9였는데, 당시 영수는 마을이 대부분 붕괴되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 중 하나였다고 한다. 특히 영수 중학교 붕괴 현장은 당시 지진 피해를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고, 현재도 지진을 기념하는 교육 장소로 보존하고 있다.
파괴의 상흔이 아직도 남아 있는 영수를 지나니 눈앞으로 웅장한 산군과 푸른 산림이 눈길을 끄면서 팬더 자생지가 있는 와룡이 새로운 풍경을 만든다. 이곳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중국 팬더 보호 센터가 있는데 최대한 자연환경에 가깝게 조성하여 사람들은 마치 숲속을 산책하듯 걸으면서 팬더를 만나볼 수 있다. 특히 여기에 사는 한국 태생의 슈퍼스타 푸바오를 만나보기 위해 한국인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서로 인접한 두 지역이 '파괴'와 '보전'이라는 이질적 자연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사이, 버스는 구불구불한 산길에 내린 구름 속을 몇 번이나 들락거리면서 머리가 띵한 가운데도 마치 구름 속을 걷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와룡에서 일륭(日隆)을 가기 위해서는 구절양장 고갯길을 지나 파랑산(5,800m)에 뚫린 파랑산 터널(3,850m)을 지나야 한다. 산 정상 아래 3,800m 지점에 위치한 휴게소에 들러 야크고기로 만든 꼬치를 처음 맛보는데 소고기보다 약간 질기지만 훈연향과 식감이 좋다. 구름이 눈높이에 있는 휴게소에서 탁 트인 조망을 감상하며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길이가 8km에 달하는 파랑산 터널을 통과하는데 족히 20분 넘게 걸린다.

터널을 빠져나오자마자 정면으로 쓰구냥산이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니 모두 차창에 붙어서 탄성을 연발한다. 빙하 녹은 옥빛 물이 거칠게 계곡을 흘러내리는데 그 소리가 차창을 넘어 차 안까지 들린다. 조금 더 내려오니 쓰구냥산(四姑娘山) 전망대가 나온다. 평일인데도 네 자매가 일렬로 서 있는 쓰구냥을 보기 위해 찾아온 중국 관광객들로 전망대는 주차할 공간이 거의 없다. 우리 일행도 관광객들 사이에 끼어 쓰구냥을 찾아본다. 운 좋게도 구름 속에서 얼굴을 드러낸 5,300m가 넘는 네 봉우리가 일렬로 서서 반긴다. 쓰구냥산은 티베트어로 사고랍신산(斯古拉神山)이라고도 부르는데, 제일 왼쪽이 네 자매 중 가장 키가 큰 막내 야오메이봉(幺妹峰, 6,250m)이다.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앙증맞은 고깔모자를 쓴 것처럼 정상 부근에 눈과 빙하를 걸치고 있는 모습이 영판 막내 형상이다.

가까이서 본 야오메이봉 산허리는 바위산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만년설이 사라져 암석 덩어리만 남은 앙상한 형상은 처연해 보이기까지 하다. 울창한 수목과 시원한 계곡물을 전경으로 온통 만년설로 뒤덮인 채 우뚝 솟아 여름과 겨울 풍광을 동시에 연출했던 사진 속의 쓰구냥산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을 자주 오는 가이드는 "가장 높은 제4봉인 야오메이봉은 만년설이 아래부터 사라지기 시작해서 요즘은 산허리도 녹고, 정상에만 조금 남았다."라고 말하면서 "쓰구냥산도 겨울에 내린 눈이 쌓였다가 여름에 녹는 여느 산이나 다를 바 없이 되어 버렸다."라며 서운한 표정을 짓는다.
일륭으로 내려와서 마을의 도로변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 허기가 졌지만 고소증세 때문에 음식이 땡기지 않았는데 매콤한 양념 돼지고기를 상추에 싸서 입안으로 털어 넣으니 금새 입맛이 돌아온다. 함께 나온 가지볶음과 오이볶음, 부추 돼지볶음도 맛나서 양껏 배를 채운다. 식당 창 너머로 멀리 설산이 보이고 산 위에 쌓여있는 하얀 눈이 보드라운 솜털처럼 느껴진다. 마을의 다리 아래로 쓰구냥산에서 흘러오는 빙하수가 도도히 흐르고 다리 위에는 형형색색 타르초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이런 풍광을 보려고 멀고 먼 동티베트까지 오는 게 아닌가 싶다.

버스가 한동안 산 아래로 향한다. 풍경은 어느새 온화하게 변한다. 눈앞의 능선길이 편해 보이고 파란 능선 위로 하얀 티베트 전통 가옥이 늘어서 있다. 파란 하늘 아래 하얀 격류가 흐르는 금천하 계곡이 너무 아름답다. 여기가 바로 소금(小金)이다. 소금은 사과로 유명한 곳이다. 길가와 산자락, 절벽 위와 아래가 모두 사과밭이다. 길가에 있는 과일 가게에 들러 사과와 자두를 한 자루 사서 버스 안에서 나누어 먹으면서 오늘의 목적지 단바를 향해 간다.
험준한 산악지대의 고산은 깎아지른 절벽의 좁고 험한 외길이 계속 이어진다. 하늘과 맞닿는 산 정상의 소복이 쌓인 만년설, 굴러떨어질 것만 같은 무채색의 괴암, 산기슭의 푸른 나무 등 비슷비슷한 풍경이 몇 시간을 달려도 끝없이 이어진다. 동화에 나올법한 기이한 모습이다. 높은 구불구불한 오르막과 내리막길이 반복된다. 협곡 사이로 끝없이 이어지는 파란 물줄기는 낮은 지대로 내려오면서 강폭을 늘려가며 호수를 이룬다. 아름답고 기묘한 자연의 경이로움이 절로 느껴진다.

소금에서 단바에 가까워질수록 장족(藏族) 마을이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단바 사람을 자룽족(嘉绒族)이라 부른다. 1950년대 소수 민족을 분류할 때 티베트 민족인 장족에 포함됐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언어와 풍습이 다른 민족이다. 자룽 티베트라는 말이 여전하고 여기 사는 사람들을 자룽인이라고 부른다. 단바에는 자룽인이 살아가는 마을이 많다. 그중 가장 유명한 마을이 갑거장채다.
갑거장채는 중국의 내셔널 지오그래픽 '중국국가지리'에서 뽑은 '중국 최고의 아름다운 마을'로 선정된 곳이다.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갑거장채를 비롯해 윈난의 다랑논 마을인 하니촌락, 신장위구르자치구 카나스 호수의 투와촌, 구이저우 리핑의 조흥동채, 윈난의 리장고성, 장시 우위엔 일대의 휘주촌락 등 '가장 아름다운 6대 향촌고진(鄕村古鎭)'을 대상으로 투표를 하면 갑거장채가 늘 제일 앞에 이름을 올린다고 한다. 그래서 갑거장채는 이름만으로도 설레고 실제 꼭 가봐야 하는 명소가 되어버렸다.
소금에서 한참을 남쪽으로 내려와 단바현을 지나면 자룽대교가 나온다. 다리 아래로 단바의 젖줄인 대도하(大渡河)가 흐른다. 여기서 조금만 올라가면 갑거장채 입구다. '가장 아름다운 마을' 표지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한 후 마을로 들어선다. 유유히 흐르는 대도하 오른쪽 산은 웅장한 절벽이다. 왼쪽 얕은 능선의 짙푸른 숲 사이로 티베트 가옥들이 옹기종기 숨어있다. 바로 갑거장채다. 갑거(甲居)는 100호, 장채(藏寨)는 장족이 사는 마을, 즉 '100호에 달하는 장족 마을’'란 뜻이다.

갑거장채가 아름다운 이유는 집이 많아서라기보다 산자락 초록의 숲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여기에 티베트 전통 색감도 한몫한다. 지붕에는 파랑‧노랑‧빨강‧하양‧초록의 오색 깃발 타르초가 나부끼고 친근한 티베트 전통 문양이 골고루 묻어 있다. 집들은 흰색과 황토색, 진홍색 물감으로 담장과 지붕을 운치 있게 수놓고 울긋불긋한 원색으로 대문과 창문을 꾸미지만 바탕은 순백의 느낌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티베트식 전통 가옥이다. 이곳은 유명세만큼 객잔이 많은데 우리가 들린 장족이 사는 가옥도 내부를 현대식으로 개조하여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가장 높은 제3전망대에서 보면 집 사이의 조루가 더 잘 보인다. 하천도 더 멀어 정지한 듯 보이고 앞산은 한결 가깝게 느껴진다. 전망대마다 전통 의상을 입은 자룽족 아주머니들이 체리와 호두, 버섯 등을 팔고 있다. 전망대 끝에 서면 절벽 산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산이 깊어서 햇볕이 이내 사그라지자 숲과 가옥들의 색깔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멍하게 앉아 한동안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느새 다른 산이 된다. 가옥은 울그락불그락, 나무와 숲은 점점 짙어간다. 좀 멀지만 모얼둬산(墨尔多山)이 보인다. 해발 5,000m가량인 주봉에서 해가 떠오르고 구름이 오가는 모습을 보며 수천 년을 이어온 갑거장채는 깊은 협곡과 신성한 산, 아무나 볼 수 없는 절경 속에 오랜 역사를 간직해 온 마을이기도 하다.

해가 산을 다 넘기 전에 갑거장채에서 내려와 30분 거리에 있는 단바 시내 메이진 호텔로 이동한다.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호텔 앞의 너른 광장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대형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장족 전통 노래에 맞춰 광장무를 추고 있다. 남녀노소 할 거 없이 모두 전통 의상이나 편한 옷차림으로 남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춤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너무 평화롭고 자연스럽다. 단바는 미인이 많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근처에 미인곡(美人谷)이라는 지명이 있을 정도다. 10월에 개최하는 펑징제(风情节)는 미인을 선발하는 이 지역의 전통 축제인데 이때 오면 미녀들을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내일부터 이번 여행의 목적인 쓰촨성 3대 설산 트레킹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가이드는 새벽 일찍 야라설산으로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일찍 자라고 했지만 호텔 객실 대형 창문을 통해 보이는 단바의 야경이 너무 아름다워 호텔을 몰래 빠져나와 단바 시내를 가로지르는 대도하를 따라 밤늦게까지 걷는다.

늦은 시간에 호텔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누이니 청두에서 이곳 단바로 오면서 차창 밖으로 끝없이 스치고 지나간 순백의 설산과 코발트 빛 강, 그리고 호수의 순수하고 원초적 아름다움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이 속에서 사람들은 투박하고 억척스럽게 삶을 이어간다. 순박하고 깨끗한 대자연에 몸을 기대고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과연 팍팍하기만 한 것일까.

[여계봉 대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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