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소기업연합뉴스] 김준수 기자 = 무더운 여름이 막바지에 이른 8월의 끝자락,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무풍면 지성리의 산자락을 찾았다. 약 1만6천 평의 나지막한 산과 숲, 그리고 그 안에 자리 잡은 농어촌 종합지원센터. 이곳에서는 자연과 함께 일하고 배우며 새로운 노년의 삶을 만들어 가는 특별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산채원이 꿈꾸는 것은 단순한 귀농이나 전원생활이 아니다. 농촌에서 일하고 소득을 얻으며 지역사회와 더불어 살아가는 자립형 시니어 공동체다. 건강할 때는 자신의 능력에 맞는 일을 하고, 나이가 들어 돌봄이 필요해지면 서로 돕고, 삶의 마지막에는 익숙한 공간에서 존엄하게 생을 마무리하는 새로운 노년의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
산채원을 이끌고 있는 사람은 조상곤·나성숙 부부다. 조상곤 대표는 의정부 민락재단에서 근무한 뒤 은퇴를 앞두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은퇴하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내가 더 이상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의 답은 분명했다. “나도 할 일이 있고, 나도 쓸모가 있다.”
그 생각이 산채원의 출발점이 됐다. 도시의 익숙한 생활을 뒤로하고 무풍으로 내려온 그는 불모지에 가까웠던 땅을 직접 일구기 시작했다. 땅을 고르고 나무를 심으며 하나씩 삶의 터전을 만들어갔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흘린 땀만큼 산은 조금씩 사람의 공간으로 변해갔다.
그 곁에는 아내 나성숙 씨가 있었다. 25년간 임상간호사로 일했던 나 씨 역시 남편을 따라 기쁜 마음으로 농촌생활을 시작했다. 사람을 돌보던 간호사의 손은 이제 산과 나무, 농작물을 돌보는 손이 됐다. 두 사람은 도농녹색교류 최고지도자 과정, 농촌관광 및 지역전문가 과정 등 전문교육도 이수하며 산채원을 단순한 농장이 아닌 미래형 시니어 생활공동체로 발전시키기 위한 준비를 이어가고 있다.
산채원에서는 참나무 생표고와 건표고를 비롯해 표고소금, 양파소금, 친환경 들기름과 참기름 등을 생산한다. 지역에서 나는 수리취를 이용한 떡과 장아찌 등 가공품도 만들고 계절마다 다양한 산나물도 수확한다.
산채원에서 생산하는 것은 농산물만이 아니다. 사람의 자존감과 삶의 의미를 함께 생산하고 있다. 도시에서 은퇴한 시니어에게 농촌의 노동은 단순한 육체노동이 아니다. 흙을 만지고 나무를 돌보며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내가 아직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김*진 씨(71세)는 자신의 변화를 이렇게 표현했다. “이 나이에 무슨… 하는 생각으로 살았는데, 더 이상 ‘그림자’가 되지 말자는 사고 전환의 계기가 됐어요.” 짧은 말이지만 그 안에는 우리 사회가 맞이한 초고령시대의 중요한 과제가 담겨 있다.
노년을 단순히 ‘돌봄을 받아야 하는 시기’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산채원의 노동은 운동이기도 하다. 자연 속에서 몸을 움직이고,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자신이 생산한 농산물이 누군가의 식탁에 오른다는 사실에서 보람을 얻는다. 이는 곧 건강·일·소득·관계·자존감을 하나로 연결하는 새로운 시니어 라이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조상곤·나성숙 부부가 꿈꾸는 미래는 더욱 구체적이다. 산채원에서 몇 명이 되더라도 함께 늙어가는 마을을 만드는 것이다. 우선 9명 정도의 노인 공동생활가정에서 시작해 여건이 허락한다면 30여 명까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이들이 만들고 싶은 것은 기존의 요양시설과는 다르다. 시설이 아니라 ‘마을’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건강할 때는 농사와 생산활동에 참여하고, 서로 식사를 나누며 살아간다. 누군가 몸이 불편해지면 이웃이 손을 내밀고 공동체가 함께 돌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이 오랫동안 살아온 익숙한 공간에서 삶을 마무리하는 ‘웰다잉(Well-Dying)’을 실현하는 것이 이들의 꿈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까지 주로 ‘노인을 어떻게 돌볼 것인가’에 집중해 왔다. 하지만 초고령사회에서는 새로운 질문이 필요하다. “노년을 어떻게 살아가게 할 것인가?” 산채원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작은 답을 만들어가고 있다.
도시의 은퇴자에게는 새로운 삶의 기회를 제공하고, 인구감소와 고령화로 어려움을 겪는 농촌에는 새로운 사람과 활력을 불어넣는다. 자연과 노동을 통해 건강을 지키고, 생산활동을 통해 소득을 얻으며, 공동체를 통해 외로움을 줄이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노년에도 자신의 역할이 있다는 사실이다. 직장에서 명함을 내려놓았다고 해서 삶의 가치까지 내려놓을 필요는 없다. 나이가 들어도 할 수 있는 일은 있고,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산채원이 보여주는 새로운 액티브 시니어의 삶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은퇴는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무대를 바꾸는 것이다.”
8월의 뜨거운 햇볕 아래 산채원의 산길을 걷다 보면 흙을 밟는 발걸음, 나무를 돌보는 손길, 수확한 농산물을 옮기는 땀방울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 이야기는 우리에게 말한다. 나이는 인생의 끝이 아니라고. 노년은 누군가에게 의지하기만 하는 시간이 아니다.
자연 속에서 일하고, 사람들과 함께하고, 서로 돌보며 얼마든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 무주의 작은 산자락에서 시작된 산채원의 꿈은 아직 작은 실험일지도 모른다. 모든 변화는 작은 시작에서 비롯된다. 한 사람의 결심이 부부의 꿈이 되고, 부부의 꿈이 몇 사람의 공동체가 되고, 그 공동체가 새로운 시니어 마을의 모델이 될 수 있다.
“함께 늙어가는 마을.” 평범하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늙는다. 그러나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는 선택할 수 있다. 혼자 고립된 노년을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자연과 함께 일하고 사람들과 함께 웃으며 서로의 삶을 돌보는 노년을 맞이할 것인가. 산채원은 후자의 길을 선택했다.
자연과 더불어 살고, 노동으로 건강을 지키며, 일과 소득으로 자존감을 회복하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돌보며, 마지막까지 익숙한 공간에서 존엄하게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 산채원이 꿈꾸는 새로운 시니어 라이프다.
무주의 작은 산자락에서 시작된 이 실험이 우리 사회의 노년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노인을 어떻게 돌볼 것인가에서, 노년을 어떻게 살아가게 할 것인가로. 산채원 사람들은 오늘도 그 답을 찾으며 산을 일구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누구도 그림자가 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할 일이 있고, 누구에게나 역할이 있으며, 누구에게나 함께할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기사 제공]
나성숙 010 4031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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